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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쟁이의 현자타임

영어 단어의 nerd를 번역하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일단 기술쟁이정도로 해 두기로 했다. ‘공부벌레라는 단어도 있지만 이것은 문과 이과 등 모든 공부를 가리지 않는다. 이 글에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부류는 이공계의 공부벌레 혹은 속어로 기술쟁이이다. 좋은 말로 공학도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다.

 

기술쟁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과학 기술이야말로 이 사회가 알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라고 믿는다. 또한 회사에서 과학 기술 관련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버스 안에서 뉴턴과 패러데이 중 누가 더 위대한 과학자인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고등학생 때는 내심 문송합니다라는 말에 공감하며, 문과에 가는 애들은 성향이 문과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수학과 과학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기술쟁이들의 이런 지나친 자부심은 오히려 인생의 성공을 저해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단지 과학 기술을 잘 안 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많이 버느냐 마느냐는 철저히 비즈니스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좋은 기술을 배우고, 좋은 학벌을 따 낸다면 적당히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적당히 좋은 직위에서 일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사업가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기술을 잘 알기 때문에 사업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기술쟁이이다. 그리고 현자타임이 왔다. 아무리 주어진 공학 공부를 해도, 자투리 시간에 C언어나 Java를 공부해도, 슈뢰딩거의 전기문을 읽으며 나는 이 사람과 같은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도, 어차피 큰 돈을 벌 수도 없을 뿐더러 사실상 이 사회에 큰 임팩트를 줄 수도, 공헌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볼 때, 기술쟁이들이 정말 정공하려면 사회의 트렌드를 읽고 수요에 알맞은 무엇가를 개발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경영진들 아래에서 일하는 월급쟁이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괜찮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그 경영진 혹은 사업가들은 대부분 분수 함수를 미분하는 방법, 센트럴 도그마, 맥스웰 방정식, Java Virtual Machine, Young’s Modulus 중 단 하나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대부분의 기술쟁이들 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트렌드를 파악 할 줄 알고, 시장을 알고, 투자를 알며, 정책을 알고, 수요 및 인맥을 알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사업이나 스타트업 중 첨단 기술을 적용한 사례가 전체의 절반, 아니 4분의 1, 아니 8분의 1은 될까? Tech가 성공적 사업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면, 기술쟁이가 큰 돈을 버는 방법 같은 건 없는 걸까?

 

최근 coronamap.site는 삽시간에 수백 만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그 영향력을 증명했다. 그것을 구현하는 데에는 그렇게까지 첨단 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열정적인 컴퓨터 공학과 출신 학생이라면 만들 수 있다. 직방, 오늘의 집, 배달의 민족, 위피, 여기어때, 쿠팡, 영단기, 스터디 서치에는 딥러닝, 블록체인, IoT, 분산처리, 양자컴퓨팅 그 어떤 것도 없지만 매우 성공했다.

 

오늘도 난 overleaf를 켜서 논문 비스무리한 걸 작성한다. 연구실에선 논문 실적이 매우 중요하다. 논문을 잘 쓰는 애들을 보면 열등감 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어차피 그것도 결국 1년에 수십만 편 나오는 논문 중 하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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